교산·난설헌의 생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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교산의 생애

허균

(許筠, 1569~1618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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허균(許筠, 1569~1618)의 자는 단보(端甫), 호는 교산(蛟山)으로 백월거사(白月居士)로도 썼다.
허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선조 27년(1594)에 문과에 급제, 1597년 문과 중시에 장원, 내외직을 역임한 후 벼슬이 좌참찬에까지 올랐고, 정부사로 명나라에 다섯차례나 다녀왔다.


시문에 뛰어났고, 소설, 희곡, 비평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최초의 한글소설인 「홍길동전」과 문집인 「성소부부고」, 우리나라 최초의 시 평론집인 「학산초담」과 「성수시화」등이 있다. 20년 전의 병자호란 예언과 그 대비책 그리고 바른 피난길의 제시, 최초로 천주교 서적을 가져와 천주교를 처음으로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등 허균은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았다.


사회제도의 모순과 정치적 부패상을 질타하고, 정치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등 실천적 삶을 살다 정치적인 음해로 인하여 목숨을 잃게 되었다. 개혁적인 정치사상가, 국방이론가, 진보적 종교가, 문학가 등 허균의 이름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.

  • 1세(1569, 선조2년)허균은 1569년 11월 3일 기사년 병자월 임신일 계묘시에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.
  • 12세(1580, 선조13년)허균의 부친 허엽이 이 해 상주 객관에서 별세하였다.
  • 17세(1585, 선조18년)초시에 급제. 김대섭의 차녀와 결혼.
  • 21세(1589, 선조22년)생원시에 급제.
  • 24세(1592, 선조25년)임진왜란 피난 중 부인이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. 외가 애일당 뒤산 이름을 따서 교산이 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.
  • 25세(1593, 선조26년)최초 시평론집 『학산초담』을 지었다.
  • 26세(1594, 선조27년)정시을과 급제 하였다.
  • 28세(1596, 선조29년)강릉부사 정구와 함께 『강릉지』를 엮었다.
  • 29세(1597, 선조30년)문과 중시에 장원급제 하였다.
  • 35세(1603, 선조36년)대관령에서 행해지는 산신제를 보고 『대령산신 찬병서』를 지었다.
  • 36세(1604, 선조37년)성균관 전적(典籍)이 되고 수안군수가 되었다.
  • 38세(1606, 선조39년)『난설헌집』을 주지번에게 줌. 『난설헌집』은 그녀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비로소 중국에서 간행되었다.
  • 39세(1607, 선조40년)삼척부사, 공주목사 역임, 『국조시산』을 편찬.
  • 43세(1611, 광해군3년)문집『성소부부고』64권 엮었다.
  • 44세(1612, 광해군4년)최초 한글소설 『홍길동전』지음(허경진 교수 이이 화씨 추정)
  • 46세(1614, 광해군6년)호조참의, 천추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.
  • 47세(1615, 광해군7년)문신정시에서 1등을 하고 정2품 가정대부에 올랐으며 동지겸 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옴.
  • 48세(1616, 광해군8년)정2품 형조판서가 되었다.
  • 49세(1617, 광해군9년)정2품 좌참찬에 오름.
  • 50세(1618, 광해군10년)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을 모함하였다. 4월 7일에 허균이 상소를 올렸으나 죄목을 알리는 결안(結案)도 없이 음 8월 24일 그의 심복들과 함께 서시(西市)에서 책형당해 생을 마감하였다.
나의 성품은 더럽고도 오똑하며 성기고도 거칠어서 권모없고 술수도 모르는데다 아첨까지도 할 줄 모른다네. 하나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잠시도 참지를 못해 남 칭찬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입이 벌써 더듬 거려진다네.
권세있는 집 대문에 발이 이르면 발꿈치가 일찌감치 쑤셔대고 높은 이들에게 절하려면 몸이 마치 기둥처럼 뻣뻣해 진다네.

- 허균, 나를 나무라는 자에게